다카기 모리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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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카기 모리미치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지도자로, 1960년부터 1980년까지 주니치 드래건스에서 선수로 활약했다. 2루수로서 베스트 나인 7회, 도루왕 3회를 기록하며, 1974년에는 팀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선수 은퇴 후에는 코치와 감독을 역임했으며, 특히 1974년 요미우리의 10년 연속 리그 우승을 저지한 것이 유명하다. 2006년에는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고, 2020년 급성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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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기 모리미치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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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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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명 | 高木 守道 |
로마자 표기 | Takagi Morimichi |
출생일 | 1941년 7월 17일 |
사망일 | 2020년 1월 17일 (향년 78세) |
출생지 | 기후현 기후시 |
신장 | 174 |
체중 | 72 |
수비 위치 | 2루수 |
투구 | 우 |
타석 | 우 |
프로 입단 연도 | 1960년 |
첫 출장 | 1960년 5월 7일 |
마지막 경기 | 1980년 10월 24일 |
선수 경력 | |
구단 | 주니치 드래건스 (1960년 ~ 1980년) |
감독 및 코치 경력 | |
구단 | 주니치 드래건스 (1978년 ~ 1986년, 1992년 ~ 1995년, 2012년 ~ 2013년) |
수상 | |
베스트 나인 | 7회 베스트 나인 (1963년 ~ 1967년, 1974년, 1977년) |
골든 글러브 | 3회 미쓰이 골든 글러브 (1974년, 1977년, 1979년) |
도루왕 | 3회 센트럴 리그 도루왕 (1963년, 1965년, 1973년) |
올스타 | 4회 일본 프로 야구 올스타전 (1966년 ~ 1967년, 1973년, 1979년) |
통계 | |
리그 | NPB |
타율 | .272 |
홈런 | 236 |
안타 | 2274 |
도루 | 369 |
명예의 전당 | |
헌액 |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
헌액 유형 | 일본 |
헌액 연도 | 2006년 |
기타 정보 | |
최종 학력 | 기후현립 기후 상업 고등학교 |
링크 | 프로 야구 재적자 명부 |
관련 기사 | 미스터 드래곤즈 다카기 모리미치 씨 급사 |
야구 교실 | 다카기 모리미치의 명인 야구 교실 |
2. 프로 입단 전
아이치현 나고야시에서 태어나 기후현 기후시에서 자랐다.[51] 기후 현립 기후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유격수였으나 어깨를 다쳐 2루수로 전향했다. 1학년 때 릿쿄 대학 4학년이었던 나가시마 시게오에게서 코치 수업을 받았는데, 나가시마는 다카기의 재능을 알아보고 감독에게 주전 기용을 추천하여 곧바로 주전으로 발탁되었다고 한다. 유격수였던 다카기를 2루수로 전향시킨 것도 나가시마의 제안이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다카기 본인은 훗날 이에 대해 "(2루수로서) 칭찬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나중에 덧붙인 이야기가 아닌가?"라고 말했다.
3학년 봄에는 선발 고등학교 야구 대회에 출전하여 결승까지 진출했으나, 같은 도카이 지역에서 선발된 주쿄 상업고등학교에게 패하며 준우승했다. 그해 여름에는 기후현 대회 예선에서 탈락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하계 고시엔 대회가 끝난 후 프로 구단의 입단 권유가 없었고, 졸업 후 와세다 대학에 진학할 예정이었지만, 현지 구단인 주니치 드래건스의 갑작스러운 입단 제의를 받고 주니치에 입단했다. 이로 인해 기후 상업고등학교 야구부 OB회에서 제명됐지만, 나중에 복귀했다. 기후시립 거울섬초등학교・기후시립 정화중학교 출신.[6] 1951년 8월 19일, 10세였던 다카기는 주니치 스타디움 화재를 주니치 스타디움 1루측 관중석에서 형과 함께 겪었지만 무사했다.[7] 소년 시절 다카기에게 있어서 프로야구 경기를 관중으로서 관전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었다.
2. 1. 유년 시절
아이치현 나고야시에서 태어나 기후현 기후시에서 자랐다.[51] 기후시립 거울섬초등학교, 기후시립 정화중학교를 거쳐 기후 현립 기후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6] 중학교 시절 야구부에 들어갔고, 고등학교 진학 후에는 유격수였으나 어깨 부상으로 2루수로 전향했다.[51] 1학년 때 릿쿄 대학 4학년이었던 나가시마 시게오에게 코치 수업을 받았는데, 나가시마는 다카기의 재능을 알아보고 감독에게 주전 기용을 추천하여 곧바로 주전으로 발탁되었다고 한다. 유격수였던 다카기를 2루수로 전향시킨 것도 나가시마의 제안이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다카기 본인은 훗날 이에 대해 "(2루수로서) 칭찬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나중에 덧붙인 이야기가 아닌가?"라고 말했다.1학년 여름부터 주전으로 발탁되어, 2학년 선배 에이스 키요사와 타다히코와 함께 제39회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에 출전했으나, 8강전에서 오미야 고등학교에 패했다. 3학년이던 1959년 봄에는 제31회 선발 대회에 출전하여 결승까지 진출했지만, 주쿄 상업의 히라누마 카즈오에게 2-3으로 패하며 준우승에 그쳤다.[51] 이 경기는 황태자의 결혼식 행렬과 겹쳐 TV 중계가 되지 않았는데, 이는 현재까지 춘하 통틀어 유일하게 중계가 중지된 대회이다. 같은 해 여름에는 기후 대회 결승에서 오가키 상업에 완봉패를 당했다.[51]
고등학교 졸업 후 와세다 대학에 진학할 예정이었지만, 현지 구단인 주니치 드래건스의 입단 제의를 받고 주니치에 입단하게 되었다.[51] 이 일로 기후 상업고등학교 야구부 OB회에서 제명되기도 했지만, 후에 복귀하였다. 1951년 8월 19일, 10세였던 다카기는 주니치 스타디움에서 형과 함께 요미우리 경기를 관전하던 중 구장 화재(주니치 스타디움 화재)를 겪었으나 무사했다.[7] 이 사건은 다카기가 소년 시절 프로야구 경기를 관중으로서 관전한 처음이자 마지막 경험이 되었다.
2. 2. 학창 시절
아이치현 나고야시에서 태어나 기후현 기후시에서 자랐다.[51] 기후 현립 기후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유격수였으나 어깨를 다쳐 2루수로 전향했다. 1학년 때 릿쿄 대학 4학년이었던 나가시마 시게오에게서 코치 수업을 받았는데, 나가시마는 다카기의 재능을 알아보고 감독에게 주전 기용을 추천하여 곧바로 주전으로 발탁되었다고 한다. 유격수였던 다카기를 2루수로 전향시킨 것도 나가시마의 제안이었다고 한다.3학년 봄에는 선발 고등학교 야구 대회에 출전하여 결승까지 진출했으나, 주쿄 상업고등학교에게 패하며 준우승했다. 그해 여름에는 기후현 대회 예선에서 탈락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와세다 대학에 진학할 예정이었지만, 주니치 드래건스의 입단 제의를 받고 주니치에 입단했다. 이로 인해 기후 상업고등학교 야구부 OB회에서 제명됐지만, 나중에 복귀했다. 기후시립 거울섬초등학교・기후시립 정화중학교 출신.[6] 1951년 8월 19일, 10세였던 다카기는 주니치 스타디움 화재를 1루측 관중석에서 형과 함께 겪었지만 무사했다.[7]
2. 3. 프로 입단 과정
아이치현 나고야시에서 태어나 기후현 기후시에서 자랐다.[51] 기후현립 기후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유격수에서 2루수로 전향, 1학년 때 나가시마 시게오에게 코치 수업을 받았다. 나가시마는 다카기의 재능을 간파하여 감독에게 주전 기용을 추천했고, 다카기는 곧바로 주전으로 발탁됐다. 유격수였던 다카기를 2루수로 전향시킨 것도 나가시마의 제안이었다.[8]3학년 봄에는 선발 고등학교 야구 대회에 출전하여 결승까지 진출했으나, 주쿄 상업고등학교에게 패하며 준우승했다. 여름에는 기후현 대회 예선에서 탈락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와세다 대학에 진학할 예정이었지만, 주니치 드래건스의 입단 제의를 받고 프로에 입단하게 됐다. 이 일로 기후 상업고등학교 야구부 OB회에서 제명됐지만 후에 복귀하였다. 기후시립 거울섬초등학교・기후시립 정화중학교 출신.[6] 10세 때 주니치 스타디움에서 요미우리 경기를 관전하다가 구장 화재를 겪었지만 무사했다.[7]
중학교 시절 야구부에 입단했고, 1957년 기후현립 기후상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처음에는 유격수였지만 어깨 부상으로 2루수로 전향했다. 릿쿄대학 4학년이었던 나가시마 시게오를 특별 코치로 초빙했는데, 다카기는 나가시마로부터 2루수로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1학년 여름에 주전이 되었고, 2학년 선배 키요사와 타다히코와 함께 제39회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에 출전했지만 8강에서 탈락했다. 3학년인 1959년 제31회 선발 대회 결승에 진출했지만, 주쿄 상업에게 패하며 준우승했다. 이 경기는 황태자의 결혼식과 겹쳐 TV 중계가 되지 않았다. 같은 해 여름 기후 대회 결승에서 다카기 카즈미가 있던 오가키 상업에 패했다.
3. 선수 시절
1960년에 주니치에 입단하여 같은 해 1960년 5월 7일 다이요 웨일스전에서 프로 데뷔 첫 홈런을 때려냈고[9] 1963년에는 2루수의 주전 자리를 차지했다. 그 해 시즌에는 50개의 도루를 기록하여 도루왕 타이틀을 석권했고 작년에 방출된 모리 도루를 대신해서 에토 신이치와 함께 주니치의 새로운 스타 선수가 됐다.
이후 1965년과 1973년에는 통산 세 번째의 도루왕을 석권하면서 준족에 가세하고 타격에서는 1969년에 24개의 홈런을 기록하는 등 통산 236홈런을 기록해 수비에서는 한다 하루오에게 배운 백 토스, 글러브 토스 등을 종종 보여주었다.[10] 1974년에는 팀의 20년 만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13] 첫 타석에서 첫 홈런을 기록한 선수로서 통산 200홈런, 통산 2000안타를 기록한 선수는 다카기가 처음이었고[52] 통산 200홈런과 200개의 희생타를 합쳐서 기록한 선수도 다카기가 처음이다.[53]
1974년에 리그 우승이 결정된 다음날 10월 13일로 예정되어 있던 고라쿠엔 구장에서의 요미우리와의 시즌 최종전에서는 나가시마 시게오의 은퇴 경기였지만 우천으로 인해 14일로 연기되면서 주니치의 우승 퍼레이드와 일정이 겹쳤다. 이 때문에 팀은 오시마 야스노리, 후지나미 유키오 등의 젊은 선수들이나 은퇴 직전이었던 히로노 이사오를 포함한 준주전급 선수들만을 출전시키고 주니치의 주전 선수는 같은 날 나고야에서의 우승 퍼레이드를 위해서 결장하라는 구단의 지시가 내려졌다. 이에 대해 다카기는 “위대한 선수에게는 실례되는 일이다”라고 크게 분개하면서 자신만이라도 출전시켜달라고 구단에게 항의했지만 구단 측은 다카기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다카기는 우승 퍼레이드에서 시종 아연 실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고 한다. 다카기는 그 후 나가시마에게 전화해서 사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같은 해 롯데 오리온스와 맞붙은 일본 시리즈에서는 1차전부터 맹활약을 펼쳤지만[15] 고라쿠엔 구장에서 열린 3차전에서는 자신이 친 타구를 왼발에 맞아 부상으로 퇴장당했다. 검사 결과 골절상을 입었고 1번 타자였던 다카기가 부상으로 빠진 주니치는 롯데에게 패하면서 일본 시리즈 우승 달성에 실패했다.[54]
1978년부터 1980년까지 선수 겸 코치로 활동했고, 2루수로서 베스트 나인 7차례 수상은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다이며 1980년에는 시력의 이상이 있어 21년간의 현역 생활을 은퇴했다. 시즌 종료 후 나고야 구장에서 열린 센트럴 리그 올스타 동서 대항전에서 1살 위인 자신보다 1년 먼저 프로에 입단한 오 사다하루와 함께 은퇴식을 가졌다.
3. 1. 주니치 드래건스 (1960년 ~ 1980년)
1960년 주니치에 입단하여 그 해 5월 7일 다이요 웨일스전에서 프로 데뷔 첫 홈런을 때려냈다.[9] 1962년까지 등번호는 '''41'''이었다.[52] 1963년에는 2루수 주전 자리를 차지했고 등번호를 '''1'''번으로 변경하였다.[52] 그 해 50개의 도루를 기록하여 도루왕 타이틀을 석권했고, 작년에 방출된 모리 도루를 대신해서 에토 신이치와 함께 주니치의 새로운 스타 선수가 됐다.[52]이후 1965년과 1973년에도 도루왕을 차지하며 통산 세 번의 도루왕 타이틀을 획득했다. 1969년에는 24개의 홈런을 기록하는 등 통산 236홈런을 기록했다. 수비에서는 한다 하루오에게 배운 백 토스와 글러브 토스를 종종 보여주었다.[10] 1974년에는 팀의 20년 만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13] 첫 타석에서 첫 홈런을 기록한 선수로서 통산 200홈런, 통산 2000안타를 기록한 선수는 다카기가 처음이었고[52] 통산 200홈런과 200개의 희생타를 합쳐서 기록한 선수도 다카기가 처음이다.[53]
1974년 리그 우승이 결정된 다음 날, 고라쿠엔 구장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시즌 최종전은 나가시마 시게오의 은퇴 경기였지만 우천으로 연기되어 주니치의 우승 퍼레이드와 일정이 겹쳤다. 구단은 젊은 선수들과 준주전급 선수들만 출전시키고 주전 선수들은 우승 퍼레이드에 집중하라는 지시를 내렸지만, 다카기는 이에 분개하며 항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다카기는 우승 퍼레이드에서 시종 굳은 표정을 지었고, 이후 나가시마에게 전화로 사과했다.[14] 같은 해 롯데 오리온스와의 일본 시리즈 1차전에서 9회말에 역전 끝내기 2루타를 치는 등 활약했지만,[15] 3차전에서 자신이 친 타구에 왼발 골절상을 입어 전력에서 이탈했고, 주니치는 일본 시리즈 우승에 실패했다.[54]
1978년부터 1980년까지 선수 겸 코치로 활동했고, 2루수로서 베스트 나인 7차례 수상은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다 기록이다.[52] 1980년에는 시력 이상으로 21년간의 현역 생활을 은퇴했다. 시즌 종료 후 나고야 구장에서 열린 센트럴 리그 올스타 동서 대항전에서 오 사다하루와 함께 은퇴식을 가졌다.[16]
3. 2. 선수 시절의 특징
다카기 모리미치는 1960년 주니치 드래건스에 입단하여, 같은 해 5월 7일 다이요 웨일스전에서 프로 데뷔 첫 홈런을 기록했다.[52] 1963년에는 주전 2루수로 자리잡아 50개의 도루를 기록하며 도루왕 타이틀을 차지했고, 에토 신이치와 함께 주니치의 새로운 스타 선수로 떠올랐다. 1965년과 1973년에도 도루왕을 차지하며 통산 세 번의 도루왕 타이틀을 획득했다.타격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보였는데, 1969년에는 24개의 홈런을 기록하는 등 통산 236홈런을 기록했다. 특히 첫 타석에서 첫 홈런을 기록한 선수로서 통산 200홈런, 통산 2000안타를 기록한 최초의 선수이며,[52] 통산 200홈런과 200개의 희생타를 함께 기록한 최초의 선수이기도 하다.[53] 수비에서도 백 토스, 글러브 토스 등을 선보이며 1974년 팀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1974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1차전부터 맹활약했지만, 3차전에서 자신이 친 타구에 왼발을 맞아 골절상을 입고 교체되었다.[54] 주전 1번 타자였던 다카기의 부상 이탈은 주니치에게 큰 타격이었고, 결국 일본 시리즈 우승에는 실패했다.
1978년부터 1980년까지는 선수 겸 코치로 활동했고, 2루수로서 베스트 나인을 7차례 수상했는데 이는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최다 기록이다. 1980년 시력 이상으로 21년간의 현역 생활을 마감했다. 은퇴 후 나고야 구장에서 열린 센트럴 리그 올스타 동서 대항전에서 오 사다하루와 함께 은퇴식을 가졌다.
주로 저타율 고투수 시대에 활약했으며, 통산 236홈런은 2루수 선발 출전율이 90%를 넘는 선수 중 역대 최다 기록이다. 레인지 팩터를 기반으로 한 2루 수비는 통산 프로야구 역대 최고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30] 규정 타석을 채운 15시즌 중 한 자릿수 홈런을 기록한 시즌은 단 3번뿐이며, 24홈런을 기록한 해도 있을 정도로 장타력을 겸비한 리드오프로 활약했다.
야구 잡지나 TV 프로그램 등에서 진행하는 '프로야구 역대 베스트 나인' 기획에서 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2루수로 선정되기도 했다.[31][32] 다카기는 2루수로 2179경기, 11477수비 기회, 5327척살, 5866보살, 284실책, 1373병살이라는 통산 수비 기록을 남겼는데, 이는 모두 2루수 프로야구 역대 1위 기록이다.
3. 3. 나가시마 시게오와의 관계
1974년 리그 우승이 결정된 다음날인 10월 13일 고라쿠엔 구장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요미우리와의 시즌 최종전은 나가시마 시게오의 은퇴 경기였지만 우천으로 인해 14일로 연기되면서 주니치의 우승 퍼레이드와 일정이 겹쳤다.[54] 팀은 오시마 야스노리, 후지나미 유키오 등의 젊은 선수들이나 은퇴 직전이었던 히로노 이사오를 포함한 준주전급 선수들만을 출전시키고 주전 선수들은 나고야에서 열리는 우승 퍼레이드에 참가하라는 구단의 지시를 내렸다.[54] 이에 다카기는 “위대한 선수에게는 실례되는 일이다”라며 자신만이라도 출전시켜달라고 항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우승 퍼레이드에서 시종 아연 실색한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54] 다카기는 이후 나가시마에게 전화해서 사과했으며, 당시 호시노 센이치도 나가시마에게 사과 전화를 했다는 내용이 ‘월간 Dragons’에 실려 있었다.[54]3. 4. 은퇴
1978년부터 1980년까지 선수 겸 코치로 활동했고, 베스트 나인을 7차례 수상했는데 이는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다 기록이다.[54] 1980년에는 시력 이상으로 21년간의 현역 생활을 은퇴했다. 시즌 종료 후 나고야 구장에서 열린 센트럴 리그 올스타 동서 대항전에서 자신보다 1년 먼저 프로에 입단한 오 사다하루와 함께 은퇴식을 가졌다.[54]4. 지도자 경력
1군 작전 수비 코치(1981년 ~ 1983년), 2군 감독(1984년 ~ 1985년), 1군 수비 코치(1986년) 등을 맡았다.[51] 1986년에는 야마우치 가즈히로 감독이 팀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을 물어 시즌 도중 감독직에서 물러남에 따라 같은 해 7월 6일부터 시즌 종료까지 감독 대행을 맡았다.[51]
1987년부터 주부닛폰 방송의 야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했고 호시노 센이치 감독의 사임으로 1992년에는 주니치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첫 해인 1992년도에는 결과적으로 리그 최하위에 떨어졌지만 정규 시즌 후반에는 상위 팀에 선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등 최종적으로 60승 70패를 기록(그 해의 센트럴 리그는 전체 구단이 60승대의 성적을 기록했다), 니시모토 다카시가 기대 이상의 활약할 수 없었던 것이 큰 원인이 되었다.
1993년에는 리그 우승한 야쿠르트 스왈로스와의 승차가 전반기에서는 큰 격차를 나타냈지만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한 때는 야쿠르트를 누르고 선두 자리에 올라섰는데 최종적으로 시즌 2위에 그쳤다. 9월 5일의 한신 타이거스전(21차전)에서 야마모토 마사를 7회에 토머스 오말리의 솔로 홈런을 허용한 것 때문에 1실점만으로 강판시켰다(점수도 7대 1). 여기서 구원 투수가 제구력 난조로 8회 1실점, 9회에 8실점을 대량 허용하며 역전패를 당했다. 다카기는 경기 종료 후 “내가 나빴다”라고 선수들에게 고개를 숙였고 시즌 종료 후 “주니치가 페넌트레이스를 취할 수 없었던 것은 이 경기에 있다”라고 말했다.
1994년, 선두였던 요미우리와의 전반기에서는 큰 격차를 냈지만 다이호 야스아키가 홈런을 연달아 기록하면서 후반기에 맹추격을 하는 등 순위에서 동률을 이루며 선두 자리에 섰고 나고야 구장에서는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명승부로 기록되는 일명 ‘10.8 결전’에서 결국 팀의 패배로 끝났다.[55] 시즌 종반에는 감독 교체설이 나돌기도 했지만 그 활약에 의해 다음 해에도 계속 지휘봉을 잡게 됐다.
그러나 1995년에는 투수진의 붕괴와 주력 선수들의 잇따른 부상으로 악재가 겹치면서 팀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시즌 도중에 감독직에서 사임했다. 감독으로서의 마지막 경기가 된 1995년 6월 2일의 한신전에서 도모요세 마사토 심판에게 항의하던 도중 폭력을 휘두르다 퇴장 처분을 받았다. 야마다 히사시가 주니치 감독 시절에 퇴장 처분을 받은 다음날의 경기 시작 전에 휴양(사실상 사임)을 명령받은 사례는 있었지만 다카기의 경우에는 마지막 경기 시작 전에 ‘오늘 마지막으로’라고 말했다.
2011년 9월 22일 오치아이 히로미쓰의 후임으로 주니치의 차기 감독으로 부임했다. 이듬해 2012년에는 2위를 기록했지만 포스트 시즌인 클라이맥스 시리즈 파이널 스테이지에서는 요미우리와 맞붙으면서 3연승을 거둔 후 내리 3연패를 당해 결국 3승 4패의 성적을 기록하여 탈락했다. 코치진과의 잡음이 끊이지 않았고, 2013년에는 64승 3무 77패(승률 0.453)로 센트럴 리그 4위에 그쳐 B클래스로 떨어지는 바람에 포스트 시즌 진출에 실패한 후 다니시게 모토노부에게 넘겼다.[56]
현역 시절의 리그 우승 경험은 요미우리의 9년 연속 리그 우승(V9)한 이후인 1974년의 한 번 뿐이었지만 그것이 요미우리의 10년 연속 리그 제패를 저지한 우승인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또, 코치로서도 1982년에만 한 차례 경험했고 일본 시리즈에서는 모두 2승 4패로 지고 있어 일본 시리즈 우승은 물론이고 유리한 고지에 오른 경험조차 한 번도 없었다.
4. 1. 주니치 드래건스 코치 (1981년 ~ 1986년)
1981년부터 1983년까지 주니치 드래건스 1군 작전 수비 코치를 맡았고, 1984년부터 1985년까지는 2군 감독을 역임했다.[51] 1986년에는 1군 수비 코치를 맡다가, 야마우치 가즈히로 감독이 성적 부진으로 시즌 도중 물러나면서 같은 해 7월 6일부터 시즌 종료까지 감독 대행을 맡았다.[51]감독 대행을 맡을 당시, 팀은 7경기 차로 뒤져 있었고, 다니자와 겐이치, 오시마 야스노리, 우노 마사루 등 주력 선수들이 연이어 부상과 부진을 겪었으며, 에이스 코마츠 타츠오가 7승에 그치는 등 어려운 상황이었다. 결국 취임 당시보다 승률이 더 나빠지면서 시즌 종료와 함께 감독 대행직에서 물러났다. 오시마 야스노리는 "모리미치 씨는 수비가 좋은 선수를 쓰고 싶어했던 것 같다"며 당시 기용에 대한 불만을 언급하기도 했다. 한편, "산나이 카즈히로 감독 경질" 소식은 신문에서 가볍게 다뤄진 반면, 다카기 감독 대행의 취임은 1면부터 3면까지 할애될 정도로 큰 축하 분위기였다.
4. 2. 제1기 주니치 감독 시절 (1992년 ~ 1995년)
1987년부터 주부닛폰 방송의 야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했고, 호시노 센이치 감독의 사임으로 1992년 주니치의 감독으로 부임했다.[55] 첫 해인 1992년에는 주력 선수들의 부상으로 인해 리그 최하위에 그쳤지만, 정규 시즌 후반에는 상위 팀에 선전하는 모습을 보이며 최종적으로 60승 70패를 기록했다. 이 해 센트럴 리그는 전체 구단이 60승대를 기록했다.[55]1993년에는 리그 우승팀 야쿠르트 스왈로스에 전반기에는 크게 뒤졌지만, 후반기에는 한때 야쿠르트를 제치고 선두에 오르기도 했으나 최종적으로는 2위에 머물렀다. 9월 5일 한신 타이거스전(21차전)에서 7회까지 1실점으로 호투하던 야마모토 마사를 7대 1로 앞선 상황에서 교체했지만, 구원 투수진의 난조로 8회 1실점, 9회 8실점을 하며 역전패를 당했다.[55] 다카기는 경기 후 선수들에게 사과했고, 시즌 후에는 이 경기가 주니치의 우승 실패에 큰 영향을 줬다고 회고했다.
1994년에는 요미우리와의 전반기에 큰 격차를 냈지만, 다이호 야스아키의 활약으로 후반기에 맹추격하여 결국 동률을 이루며 선두 자리에 섰다. 나고야 구장에서 열린,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명승부로 기록되는 일명 ‘10.8 결전’에서 요미우리에 패하며 리그 우승을 놓쳤다.[55] 시즌 종반 감독 교체설이 돌았지만, 후반기의 성과를 인정받아 다음 해에도 감독직을 유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1995년에는 투수진 붕괴와 주력 선수들의 잇따른 부상으로 팀 성적이 부진했고,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시즌 도중 감독직에서 사임했다. 1995년 6월 2일 한신전에서 심판에게 항의 도중 폭력을 휘둘러 퇴장 처분을 받았는데, 이 경기가 그의 감독으로서 마지막 경기가 되었다.[55]
4. 3. 제2기 주니치 감독 시절 (2012년 ~ 2013년)
2011년 9월 22일 오치아이 히로미쓰의 후임으로 주니치의 감독으로 부임했다.[25] 이듬해 2012년에는 2위를 기록했지만 클라이맥스 시리즈 파이널 스테이지에서 요미우리와 맞붙어 3연승 후 내리 3연패를 당해 3승 4패로 탈락했다. 코치진과의 잡음이 끊이지 않았고,[56] 2013년에는 64승 3무 77패(승률 0.453)로 센트럴 리그 4위에 그쳐 B클래스로 떨어지는 바람에 포스트 시즌 진출에 실패한 후 다니시게 모토노부에게 감독직을 넘겼다.[56] 9월 25일, 같은 해로 감독직에서 물러날 의향이라는 것이 중일신문에서 보도되었고,[27] 10월 8일 사퇴 기자회견을 실시했다.[28]현역 시절 리그 우승 경험은 요미우리의 9년 연속 리그 우승(V9) 이후인 1974년 한 번뿐이었지만, 요미우리의 10년 연속 리그 제패를 저지한 우승으로 잘 알려져 있다. 코치로서는 1982년에 한 차례 경험했고 일본 시리즈에서는 모두 2승 4패로 지고 있어 일본 시리즈 우승은 물론이고 유리한 고지에 오른 경험조차 한 번도 없었다.
5. 해설자 및 평론가 시절
1996년부터 주부닛폰 방송의 야구 해설위원과 주니치 신문 야구 평론가로 다시 발탁되었고, 2007년부터는 나카 도시오를 대신해 주니치 드래건스 OB회 회장으로 발탁되었다.[25] 2003년 시즌 종료 후에는 다쓰나미 가즈요시와 함께 주니치의 유력한 감독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지만, 주니치에서 선수로 활약했던 오치아이 히로미쓰가 감독으로 취임했다.
2006년에는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고, 그 해의 일본 시리즈 1차전에서는 시구자로 나섰다.[25] 2007년부터는 나카 도시오를 대신하여 주니치 OB회 회장을 역임했다.
2003년 오프 시즌에는 다니자와 켄이치, 노무라 가쓰야, 우시지마 카즈히코 등과 함께 주니치의 차기 감독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오치아이 히로미쓰가 취임하면서 감독 복귀는 실현되지 않았다.
고령으로 인해 평론 활동은 CBC 텔레비전・CBC 라디오의 야구 중계 부음성 게스트 등으로 제한되었다. 한편, 소년 야구 교실에서 아이들을 지도했으며,[29] 사망하기 5일 전인 2020년 1월 12일에는 CBC 라디오 ‘반도 선데이’에 출연하여 반도 에이지와 현역 시절의 추억을 이야기했다.
6. 말년
1996년부터 중일신문 야구 평론가, CBC 야구 해설자로 활동했다.[57] 2003년 오프 시즌에는 다니자와 켄이치, 노무라 가쓰야, 우시지마 카즈히코 등과 함께 주니치의 차기 감독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으나 오치아이 히로미쓰가 감독으로 취임하면서 실현되지 않았다. 2006년에는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고, 2006년 일본 시리즈 1차전에서 시구식을 맡았다.[29] 2007년부터는 나카 리오를 대신하여 주니치 OB회 회장을 역임했다.
감독에서 물러난 후, 고령으로 인해 평론 활동은 주부닛폰 방송 TV·주부닛폰 방송 라디오의 야구 중계에서 게스트로 출연하는 정도로 산발적이었다. 한편, 소년 야구 교실에서 어린이들을 상대로 지도했고,[57] 사망 5일 전인 2020년 1월 12일에는 CBC라디오 《반도 선데이》에 출연해 반도 에이지와 현역 시절의 추억담을 나누었다.[50]
2020년 2월 15일 나고야시에서 열리는 행사에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2020년 1월 17일 4시에 급성 심부전으로 향년 7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50]
7. 에피소드
다카기 모리미치는 말수가 적고 온화한 이미지와는 달리, 자신의 플레이 스타일과 야구 이론에 확고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어, 이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에는 강하게 반발하는 면모를 보였다.[33] 이러한 성격 때문에 "순간 온수기"나 "폭주 노인"이라고 불리기도 했다.[33] 반면, 야마모토 마사루는 다카기 감독에 대해 "아무리 타격을 입어도 질책을 받은 적이 없다"며 "나를 처음으로 어른으로 대해준 감독"이라고 평가했다.[34]
입단 3년 차에는 평범한 2루수라면 잡을 수 없는 타구를 잡았지만 포구하지 못한 것에 대해 스기우라 키요시 감독에게 꾸중을 듣자, 이에 반발하여 경기 도중 벤치를 빠져나와 합숙소로 돌아간 적도 있다.[33] 당시 다카기는 칼튼 한다의 백토스를 연습하여 자신의 스타일로 만들려고 시도하던 시기였다.
반도 에이지는 다카기가 자신에게 상하관계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대했다고 증언했다. 반도가 위기에 몰리면 다카기가 마운드에 와서 심하게 질책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다이요전에서 끝내기 패배를 당했을 때는 "'''그랬으면 빨리 맞아!'''"라고 격노하기도 했다.
10.8 결전에서 자이언츠가 선발 3인방을 아끼지 않고 투입한 것에 대해, 평소대로 구원 투수를 등판시킨 다카기의 강함과 졌을 때 "내가 나빴다"고 사과하는 깨끗함이 있었다고 이마나카 신지는 평가했다.
1964년, 구단 창설 이래 최초로 최하위에 머무르자 구단은 전원 일률적으로 25% 감봉이라는 기준을 정했는데, 다카기는 "작년보다 좋은 성적을 남겼기 때문에,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반발했다.
현역 시절에는 경기마다 새 스타킹을 신었고, 사용 후 스타킹은 키마타 타츠히코가 몰래 사용했다.[35] 카키모토 미노루가 견제구를 계속 던지자 "이제 그만해"라는 의사 표시를 한 적도 있다. 홋카이도 원정에서는 세키모토 요시지와 난투극을 벌이기도 했다.
매일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는 성격으로, 그의 대명사인 "백토스"는 수년간의 훈련 끝에 익힌 것이다.[33] 첫 타석 첫 홈런을 친 선수 중 한 명으로, 2017년 시즌 종료 시점에서 홈런 수 2위 기록을 가지고 있다.[36] 팬을 소중히 여겨 사인회에서는 마지막 한 사람까지 사인을 해주었다고 타오 야스시와 타니자와 켄이치가 회상했다.[37]
경북기성상업고등학교 후배인 다카하시 나오코와 와다 카즈히로와 함께 모교에서 "빅3"로 불리며, 2004년 11월 23일에는 기후 메모리얼 센터에서 이들 3명의 토크쇼가 열렸다.
반도 에이지의 중매로 결혼했으며, 부인의 누나의 손자가 NHK 아나운서 카타야마 치에코이다.[38] 히로오카 타츠로와 친분이 있으며, 2012년 주니치 스프링캠프에서는 히로오카가 임시 타격 코치를 맡았다.
"무뚝뚝한 우문"이라고 불렸지만, 이데 슌과 가족끼리 교류하거나, 니이타카 히로시에게 결혼식에서 입을 모닝코트를 빌려주는 등 소탈한 성격이기도 했다.[39] 나고야 돔에서 야구 중계 해설을 할 때는 핫도그를 스태프에게 나눠주었다.[40]
두 번째 감독 재임 시에는 경기 후 인터뷰에서 자기 팀 선수를 지명하여 비판하는 경우가 많았다. 히라노 켄 외야 수비 주루 코치가 실수를 연발하자, 2012년 5월 3일 한신전에서는 경기 도중부터 사인 플레이를 포기하기도 했다.[41] 투수 코치인 곤도 히로시는 다카기에게 "매스컴 앞에서 선수의 험담을 하지 말아 달라"고 타이르기도 했다.[42][43] 2013년에는 일부 베테랑 선수들에게 험담을 듣기도 했지만, 다카기는 "뭐라고 해도 결과를 내면 된다"고 개의치 않았다.[45] 2013년 5월 15일 일본햄 전에서는 이바타 히로카즈와 일촉즉발의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다카기는 이바타를 용서했다.[46]
8. 상세 정보
8. 1. 출신 학교
기후 현립 기후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8. 2. 선수 경력
주니치 드래건스에서 1960년부터 1980년까지 선수로 활동했다.8. 3. 지도자 경력
다카기 모리미치는 1978년부터 1980년까지 선수 겸임으로 주니치 드래건스 1군 타격 코치를 맡았고, 1983년까지 1군 타격 코치를 역임했다. 1984년부터 1985년까지는 주니치 드래건스 2군 감독을 맡았다. 1986년에는 주니치 드래건스 1군 수석 코치를 맡았으며, 같은 해 7월 6일부터 시즌 종료 때까지 감독 대행을 맡았다. 1992년부터 1995년 6월 2일까지, 그리고 2012년부터 2013년까지 주니치 드래건스 감독을 역임했다.8. 4. 수상 및 타이틀 경력
다카기 모리미치는 통산 3회의 도루왕을 석권했고,(1963년, 1965년, 1973년) 베스트 나인에 7회(1963년 ~ 1967년, 1974년, 1977년) 선정되었다.[47] 2루수 부문 5년 연속 베스트 나인 선정은 치바 시게에 이은 역대 2위 타이 기록이며, 2루수 부문 7회 베스트 나인 선정은 역대 1위 타이 기록이다.[47] 다이아몬드 글러브상은 3회(1974년, 1977년, 1979년) 수상했다.[47] 1974년에는 일본 시리즈 감투상을 수상했고,[47] 2006년에는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47] 2014년에는 NPB 80주년 베스트 나인(2루수 부문)에 선정되었고[47] 2000년에는 기후 시민 명예상을 수상했다.[47][58]8. 5. 개인 기록
다카기 모리미치는 1960년 5월 7일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당시 다이요 웨일스)와의 경기에서 7회말 이노우에 노보루의 대주자로 첫 출전했다. 같은 경기에서 첫 도루와 첫 안타, 첫 홈런, 첫 타점을 기록했는데, 9회말에 기록한 첫 홈런은 역사상 4번째 첫 타석 첫 홈런이었다. 1960년 6월 30일에는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당시 국철 스왈로스)와의 경기에서 7번·3루수로 첫 선발 출전했다.1969년 7월 30일, 아톰스와의 경기에서 2번·2루수로 선발 출전하며 통산 1000경기 출장을 달성했다. 같은 해 8월 26일에는 100홈런, 9월 28일에는 1000안타를 달성했다. 1973년 8월 28일에는 한신 타이거스와의 경기에서 1번·2루수로 선발 출전하여 1500경기 출장을 기록했고, 같은 해 9월 8일에는 300도루를 달성했다. 1974년에는 4월 22일에 1500안타, 9월 30일에는 150홈런을 기록했다.
1977년 8월 22일, 야쿠르트 스왈로스와의 경기에서 1회초 아이다 테루오로부터 좌월 선두타자 홈런을 기록하며 통산 200홈런을 달성했다. 같은 해 9월 1일에는 350도루, 9월 14일에는 300 2루타와 3000루타를 달성했다. 1978년 4월 5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의 경기에서 1회초 다카하시 사토시로부터 중전 안타를 기록하며 통산 2000안타를 달성했고, 4월 7일에는 2000경기 출장, 6월 22일에는 1000득점을 기록했다.
1977년 6월 12일부터 6월 14일까지 4타수 연속 홈런 및 4타석 연속 홈런을 기록했다.[49] 3경기에 걸친 3타석 이상 연속 홈런은 역사상 유일한 기록이다.[49] 1964년 8월 5일에는 1경기 5도루를 기록했고, 나고야 구장에서 통산 1000안타를 기록했다. 또한, 올스타전에 4회(1966년, 1967년, 1973년, 1979년) 출전했다.
8. 6. 등번호
다카기 모리미치는 선수 시절에는 1960년부터 1962년까지 41번을, 1963년부터 1982년까지 1번을 등번호로 사용했다. 1983년에는 67번, 1984년부터 1986년까지는 71번, 1992년부터 1995년까지는 81번, 2012년부터 2013년까지는 88번을 사용했다.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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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データ】村上宗隆プロ野球新5打席連続本塁打 20人「打数」と13人「打席」の両方を更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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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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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阪神・江越 珍記録!3試合にまたいで3打席連発「やっと来たな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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スポニチ Sponichi Annex 野球
2016-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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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ミスタードラゴンズ高木守道さん死去(78歳) バックトスは永遠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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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니치 신문사
2020-01-18
[51]
웹인용
高木守道の名人野球教室~内野守備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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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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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이나바 아쓰노리와 고마다 노리히로의 200홈런과 2000안타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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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이시게 히로미치와 다니시게 모토노부의 기록
[54]
문서
무라타 조지, 히코노 도시카쓰의 홈런 기록
[55]
문서
이마나카 신지, 마키하라 히로미, 사이토 마사키, 구와타 마스미, 가쿠 겐지, 야마모토 마사, 고마쓰 다쓰오 관련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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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다니시게 주니치 새 감독, 수비야구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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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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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高木守道さん急死 78歳、ミスター・ドラゴン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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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니치 신문사
2020-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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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岐阜市民栄誉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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